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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난티 타임즈

KOREA, SEPTEMBER~OCTOBER 2025

이터널저니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1. 문학 컨퍼런스
2027 제 1회 부산 파도 문학 컨퍼런스

인영은 흰 바탕에 큼지막한 푸른색으로 쓰인 현수막의 글씨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아직 모임의 회원들이 다 모이지 않은 아난티 앳 부산 코브의 미팅룸은 탁 트인 바다가 밀려들어올 듯펼쳐진 곳으로, 환한 햇볕과 윤슬의 빛이 그대로 들어와 분위기를 더욱 그럴듯하게 고조시켰다.
멀찍이 떨어져 앉은 몇 사람들이 책을 읽거나 핸드폰을 들여다 보고 있었다.
1박 2일 일정으로 진행될 오늘의 행사는 부산 지역의 파도 문학회 회원들이 모이는 자리로, 대면은 처음이기에 모인 회원들은 딱히 대화를 나누지 않았고 저마다의 섬이 되어 떨어져 앉아 있었다.
파도 문학회는 전국에서 글 좀 쓴다는 이들이 모인 온라인 공간에서 활발히 도서에 대한 식견을 나누고, 하루가 멀다하고 꽤 괜찮은 수준의 장편소설과 시, 수필, 평론이 업로드 되는 곳이었다.
서로의 글에 대해 이를테면 ‘주제랑 소재를 아예 다시 잡으셔야겠는데요.’, ‘서사의 질은괜찮네요. 문제는.. 노잼이라 아무도 안 읽을 거 같은 거?’와 같은 가감 없는 합평을 쏟아냈지만 실제로 얼굴을 마주한 적은 없었다.
아난티 리조트의 서점, 이터널저니에서 모임을 주선해 주었고 부산 지역에서도 서로를 만나는 것은 처음이었기에 누가 ‘강백산’ 회원인지, 누가 ‘시쓰는나그네’ 회원인지 알 길이 없었다.
그래도 나름 글 쓰는 사람들의 모임이기도 하여, 핸드폰만들여다 보고 있는 것도 애매한 구석이 있었다. 인영은 너무 티나지 않게 주변을 둘러보았다.

시선이 멈춘 곳에 그녀가 있었다. 장소에 어울리지 않는 듯한 회색 후드티에 감색 면바지. 정돈이 덜 된 머리카락은 부스스했고, 뿔테 안경은 코 아래에 살짝 걸쳐 있었다.
인영은 그녀를 알고 있다는 확신이 들었다. 분명 파도 문학회 회원일텐데, 어디에서 봤을까. 저번 달의 아난티심야책방에서 마주친 적이 있었나.
어색함의 기류 속에 누구와라도 대화를 나누고 싶어, 인영은 슬쩍 그녀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그럼에도 그녀는 인영 쪽으로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저기,”
그녀는 대답 없이 놀란 눈빛으로 인영을 돌아봤다.
“안녕하세요. 저 ‘퇴고무한루프’예요.”
“아, 안녕하세요. 저는 ‘달빛필사’예요.”
“어, 저 그거 읽은 적 있어요. <그림자를 품은 행성>이요. 그거 진짜 재미있게 읽었는데.”
“그러셨구나, 감사해요.”

<그림자를 품은 행성>은 빛을 잃어버린 행성에서 살아가던 사람들이 다른 행성으로의 이주를 꿈꾸며 벌어지는 일들을 그려낸 흥미진진한 SF 소설이었다.
인영은 문체로만 상상하던 사람을 만난 것이 괜히 반가워 아예 그녀 옆에 자리를 잡고 궁금했던 걸 물었다.
“그런데 혹시 저번 달 심야책방에 오셨어요? 안희연 시인님 오셨을 때요.”
“아, 저 그때 일정이 있어서 못 갔어요. 원래 매달 쭉 갔었는데요. 아쉽더라고요.” 그렇다면 그녀를 향한 기시감은 그저 기분 탓일터였다. 아, 하며 천천히 고개를 주억일 때 진행자가 등장했고, 문학회 행사가 시작되었다.
인영은 달빛필사의 옆에 앉아 행사 프로그램에 즐겁게 참여했다. 그러나 여전히 작은 물음 하나가 인영을 놓아주지 않았다.

저 여자를 분명히 봤는데, 대체 어디였을까?

#2. 책 속의 단어

“회원님들을 위해, 제가 독립 출판으로 펴낸 도서를 준비했습니다. 한 권씩 가져가세요.”프로그램이 끝나고 흩어질 때, 인영은 기념으로 준비된 책을 집어 들었다. <끝이 없는 계절>이라는 한 회원의 수필집이었다.
긴장이 풀리고 서로 조금씩 친밀해진 회원들과 라메르 레스토랑에서 만찬을 즐기고 나서 인영은 객실로 체크인 했다. 넓은 침대에 누워 오늘의 일을 반추하다 수필집을 집어 들었다.
자연 속에서 여유를 즐기며 사랑하는 마음을 되찾았다는 주제가 주된 내용이었다. 42페이지를 읽고 있을 때, 문득 붉은 동그라미 하나가 눈에 띄었다.
‘내가 진정원했던 것은 마음의 편안함이 아니었을까 한다.’ 라는 문장 속 ‘다’ 한 글자에만 동그라미가 쳐져 있었다. 이게 뭐지, 독립 출판이라더니 불량인가.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글을 계속 읽어나가던 그때, 인영의 객실 벨이 울렸다. 나가보니 ‘달빛필사’가 서 있었다.
“퇴고님, 방해해서 미안해요. 그냥 같이 얘기하고 싶어서요.”
“방해 아니에요. 들어오세요.”
달빛필사는 자연스레 객실 안 의자에 앉아 인영을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다. 낯을 가리던 그녀와는 프로그램을 함께 참여하며 꽤 가까워진 상태였다. 이런저런 얘기를 하다가 달빛필사는 자신의 개인적인 상황을 털어놓았다.
“사실 전 지금 가족들과 좀 떨어져서 제주에서 지내요.”
“무슨 사정이 있으신 거예요?”
“그건 아니고... 그냥 글을 써야해서요. 요새는 한 번 글을 쓰기 시작하면, 억지로라도 끝을 낼때까지 쓰거든요. 그게 장편소설이든, 시든, 닥치는 대로 쓰고 있어요. 글을 쓰느라 부모님과 대화도 잘 안하고, 혼자 있고 싶어서 제주로 무작정 내려갔어요.”

“저도 그래요. 한 번 글 쓰기 시작하면 초고 마칠 때까지 방에 틀어박혀서 나오지 않아요. 글을 쓰고 있지 않으면, 누군가 저를 감시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고요. 어서 작품을 내고싶은 건지, 조바심이 나나봐요.”
“전, 그냥 완성을 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은 느낌이 들어요. 한 번 시작하면요. 이것도 강박일까요.”
말을 하는 그녀의 손에는 <끝이 없는 계절>이 들려 있었다.
“저도 이거 읽고 있었는데.”
“안 그래도 읽다가 이상한 게 보여서 퇴고님 것도 보러 왔거든요.”
“어떤 거요?”
달빛필사의 책 역시 42페이지에 붉은 동그라미가 있었다. 그녀의 동그라미 속 글자는 ‘진’이었다.
“역시 단순한 불량이 아니네요. 주최측에서 또 재미있는 행사를 준비한 거 아닐까요?”
“단톡방에 한 번 물어볼까요? 다들 어떤 글자가 있는지.”
“좋아요.”

인영은 부산 지역 파도 문학회 단체 메신저 채널을 열었다. 부산 지역 채널의 인원은 총 9명, 그 중 오늘의 행사에 참여한 인원은 8명이었다.
인영은 자신의 동그라미를 찍어 전송하며, 혹시 다른 회원들의 책에도 이런 동그라미가 있는지 물었다. 메시지를 확인한 회원들은 다들 하나둘씩 자신의 동그라미를 찍어 보냈다.
‘있’, ‘실’ 등 제각각 다른 그들의 글자를 달빛필사와 함께 조합하니 이런 문장이 완성되었다.

진실은 중앙에 있다
흥분한 인영은 이 사실을 회원들에게 알렸다. 재미있는 사실을 발견한 회원들은 단체 메신저
에서 저마다의 의견을 내세우며 문장의 뜻을 밝히기 위해 토론했다.
- 중앙이면 저희 행사한 홀 중앙?
- 아닌 것 같은데 거기에 암것도 없어요
- 그냥 문학적인 표현은 아니겠죠 ㅋㅋ 모든 진실은 우리 마음의 중심에 있다.. 이런 그때 한 회원이 아무 말 없이 링크 하나를 전송했다. 아난티 중앙의 홈페이지였다.
- 오 아난티 중앙?
- 이게 맞는 듯
- 아난티 투어 한 번 해야겠네 우리
- 진짜 날 잡고 한 번 가보시죠? 숨겨진 이벤트가 있는 것 같은데
- 부산도 왔는데 충북이라고 못가겠습니까 저도 갈게요
- 아 부럽다 가서 골프치고 싶다
- 저희는 골프공보다도 진실을 찾을 수 있는 거 아니겠습니까~
- 설마 가서 골프 치게 해주는 거 아닐까?
- 파도 문학회 그렇게 돈 많지 않습니다…..
흥미로운 이벤트에 들뜬 회원들은 늦게까지 이야기를 나눴고, 인영과 달빛필사도 대화를 나누다가 각자 방에서 잠들었다. 그리고 프로그램 마지막 날의 아침이 밝았다.
달빛필사는 그대로 사라졌다.

#3. 중앙으로 오세요

- 필사님, 오늘 식사는 안 오시나요?

아무리 기다려도 달빛필사가 오지 않자, 인영은 단톡방에 메시지를 남겼다. 다른 회원들이 모두 메시지를 확인했고, 메시지 옆 숫자 1만이 계속 사라지지 않았다.
남은 사람들에게 물어보자 그들도 모두 필사의 행방을 모르는 눈치였다. 마지막 날, 함께 식사를 하기로 한 시간은 오전 10시였고 아직 9시 40분 즈음이었다. 늦잠을 자고 있는 거라면 깨워줄 생각으로 인영은 달빛필사의 객실로 향했다.
412호 앞에서 인영은 문도 두드려보고 벨도 눌러보았지만 아무런 인기척이 들리지 않았다.
늦잠을 자고 있다고 생각하며 전화를 걸려던 그때, 인영은 412호의 문이 아주 조금 열려 있는 걸 발견했다. 이래도 되나, 싶다가도 달빛필사가 없는 식사 자리는 참여하고 싶지 않았기에 인영은 슬쩍 문을 열어보았다. 머뭇거리며 돌아본 객실은 텅 비어 있었다.
달빛필사는 보이지 않았고, 침대 위에 노트북과 노트, 옷가지가 너저분하게 널려 있었다. 인영은 달빛필사가 잠시 산책이라도 나간 거라고 생각했다. 노트북 화면에는 사이트 하나가 열려 있었다.
아난티 내부의 서점이자 라이프스타일 숍, 이터널저니의 온라인 사이트였다. 상품군이 꽤 잘 구비되어 있어 인영도 몇 번 둘러본 적이 있는 사이트였다. 그녀의 차림새로 봐서는 쇼핑을 즐기는 것 같진 않았는데.
그런데 이터널저니 온라인 사이트의 메뉴와 화면이 좀 달랐다. 인영이 가까이 다가가서 살폈다. 파도 문학회의 상징적인 로고, 그리고 어디에서 많이 보던 대화가 보였다.

강백산 27: 오 아난티 중앙?
문잘알 27: 이게 맞는 듯
강백산 27: 아난티 투어 한 번 해야겠네 우리
시쓰는나그네 27: 진짜 날 잡고 한 번 가보시죠? 숨겨진 이벤트가 있는 것 같은데
퇴고무한루프 27: 부산도 왔는데 충북이라고 못가겠습니까 저도 갈게요
포스트잇작가 27: 아 부럽다 가서 골프치고 싶다
강백산 27: 저희는 골프공보다도 진실을 찾을 수 있는 거 아니겠습니까~
문잘알 27: 설마 가서 골프 치게 해주는 거 아닐까?
포스트잇작가 27: 파도 문학회 그렇게 돈 많지 않습니다.

어째서 이 사이트에 우리의 대화가 그대로 남겨져 있는 걸까. 달빛필사가 옮겨 적은 걸까. 인영은 달빛필사를 먼저 찾아야겠다는 생각을 했지만 그녀는 객실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고, 단체
메신저에도 끝끝내 나타나지 않았다. 인영은 이터널저니 사이트의 화면을 핸드폰으로 촬영하고, 회원들이 모인 식사 자리로 돌아갔다.
“필사님은요?”
“어디 가셨는지 모르겠어요. 그것보다, 이거 좀 같이 봐주세요.”
“뭐예요 이게?”
자신들의 대화가 적힌 화면을 본 회원들의 반응은 제각각이었다. 아무리 히든 이벤트라고 해도 대화 사찰은 너무하다는 말, 아니 애초에 그게 가능하냐는 말, 알고보니 달빛필사가 이벤트를 기획했기에 우리들의 반응을 살핀 거라는 말 등.
“달빛필사님이 주최측이었네.”
“그래보이진 않으셨는데,, 어제 책에 그려진 동그라미도 진짜 처음 보시는 눈치였어요.”
“그 정도 연기는 누구나 하죠.”
“우리 그러면 진짜 중앙으로 가봐요. 거기에 뭐 선물 숨겨둔 거 아닐까?”

의심과 의문, 남모를 기대가 뒤섞인 채, 인영과 회원들은 아난티 중앙으로 향했다. 회색빛으로 질린 하늘 아래, 바람은 점점 차가워졌고, 어딘가 부서지는 소리가 풀숲에서 들려왔다. 중앙의 골프장은 이상할 정도로 조용했다.
라운딩하는 이도, 직원도, 인기척 하나 없었다. 클럽하우스로 향하는 길에 그들은 점점 말이 없어졌고, 서로 눈을 마주치지 않았다. 마치 눈을 마주치면 무언가 깨져버릴 것처럼.
자동문은 무력하게 열렸고, 내부는 아무도 없는데 누군가 금방이라도 다시 나타날 듯 어수선했다. 한쪽 구석에 쓰러진 와인잔, 희미하게 깜빡이는 도어락, 끝나지 않은 음악이 마치 텅 빈 공간 위로 흘렀다.

인영은 벽 한쪽에서 이상한 소리를 들었다. 낮고 무거운, 금속을 문지르는 듯한 소리. 회원들 중 누군가 먼저 그쪽으로 다가갔다. 벽면엔 이상하게 눈에 띄지 않는 문이 있었고, 강백산이 문을 슬쩍 열자 그 아래로 계단이 나타났다.
그들은 이 모든 상황이 더이상 행복하고 즐거운 이벤트와는 거리가 멀다는 것을 깨달았음에도, 그 계단을 따라 조용히 지하로 내려가고 있었다.
아래 공간은 위층과 완전히 달랐다. 조명은 흔들렸고, 벽은 차가운 콘크리트였으며, 공기에는 금속 냄새와 정체불명의 약품 향이 섞여 있었다. 그리고 그 중심엔 침대 하나.
하얀 시트가 덮여 있었고, 그 위에 누군가가 조용히 누워 있었다. 달빛필사였다.
달빛필사가 누운 침대 옆으로 검은 옷의 무리가 서 있었다. 검은 무리 중 한 사람이 앞으로 나왔다. 전에 자신의 수필집을 기념으로 가져왔다고 했던, 회원 중의 바로 그 한 사람이었다.
“원래는 여러분 모두를 좀 더 천천히 모시려 했어요. 하지만 달빛필사님이… 예상보다 빨리 눈치채셨죠. 아카이브에 접근하셨거든요.”
“아카이브가 뭡니까? 여긴 또 어디고요?”
“이터널저니 온라인 속, 숨겨진 우리만의 공간이죠. 파도 문학회 여러분을 위한 공간이기도 하고요.”

인영은 그 말을 듣는 순간, 자신이 봤던 이터널저니 온라인의 화면이 떠올랐다. 어딘가 익숙하던 그 화면. 분명 파도 문학회 회원들이 글을 등록하고, 합평을 하고, 댓글을 달던 그 공간.
파도 문학회 홈페이지는 거대한 이터널저니 온라인 속 하나의 메뉴이고, 회원들은 이터널저니 서점을 위한 하나의 인간 콘텐츠에 불과했던 거였다. 그제서야 인영은 이 모임의 주최측, 그리고 장소까지 친절히 제공했던 아난티와 이터널저니에 대해 깨달았다.
이상하게도 아무 감정이떠오르지 않는 자신을 느꼈다. 심장은 뛰는데, 마음은 멍했다. 누군가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우리, 예전에 여기 와본 적 있지 않아요?”
그 한 마디에, 인영의 머릿속에서 무언가가 툭 끊어졌다. 오랜 시간 흐릿했던 장면들이 또렷해졌다.
매년 이맘때쯤, 이유 없이 몰려오던 글을 쓰고 싶은 충동. 익숙한 문장, 이유 없이 떠오르는 이야기들.
검은 셔츠를 입은 남자가 조용히 말했다.
“맞아요. 여러분은 매년 이곳에 옵니다. 기억은 사라지지만, 손은 기억하거든요. 우리는 반복을 통해 진짜 기억을 덮고, 창작의 욕망만 남깁니다. 그리고 매번, 여러분은 훌륭한 이야기들을 남겨주셨죠.”

공기 속 금속 냄새는 더 짙어졌다. 위험한 냄새임을 감지했지만, 이미 인영의 시야는 흔들리고 있었다. 눈앞의 얼굴들, 벽지, 빛, 모든 것이 번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들린 목소리.
낮고 부드러운 말투였지만, 귓속을 울리는 묘한 울림이 있었다.
“이터널저니 서점은 그렇게 완성되는 곳이에요. 전국 파도 문학회 여러분의 이야기로 지어지는 창작 실험 플랫폼이죠. 파도 문학회는 수준이 높아 특별하게 선정된 단체거든요.
창작력이 탁월하고, 무엇보다… 잘 순응하시더라고요. 이제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세요. 원래의 기억은 곧 흐려질 테니까요. 하지만 걱정 마세요.
손은 계속 글을 쓸 거예요. 익숙하잖아요? 어딘가에서 누가 지켜보고 있는 기분… 그게 바로 영감이거든요. 여러분의 이야기가 저희 고객님들에게 영원히 읽히게 될 거예요. 자, 그럼 1년 후에 다시 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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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험 기록 문서 #P27-88-A
관찰 대상: 파도 문학회 루프 27기
세션 명: '자발적 복귀 욕구 유도 실험'
관찰 위치: 클로즈드 채팅 그룹 – “파도 문학회_부산”
대화 내용 (9월 15일 기록):
강백산 27: 오 아난티 중앙?
문잘알 27: 이게 맞는 듯
강백산 27: 아난티 투어 한 번 해야겠네 우리
시쓰는나그네 27: 진짜 날 잡고 한 번 가보시죠? 숨겨진 이벤트가 있는 것 같은데
퇴고무한루프 27: 부산도 왔는데 충북이라고 못가겠습니까 저도 갈게요
포스트잇작가 27: 아 부럽다 가서 골프치고 싶다
강백산 27: 저희는 골프공보다도 진실을 찾을 수 있는 거 아니겠습니까~
문잘알 27: 설마 가서 골프 치게 해주는 거 아닐까?
포스트잇작가 27: 파도 문학회 그렇게 돈 많지 않습니다…..

비고
- 반복 주기 인식 없음 (성공)
- 복귀 충동 유도 성공률 92%
- 루프 27기의 특이사항: 유머 코드 활성화로 방어기제 작동 중
- 메모: 퇴고무한루프 27의 발언 “충북이라고 못 가겠습니까 저도 갈게요”는 지난 루프(26기)와 동일한 패턴
- 다음 회차 전, 기억 희석 프로토콜 업데이트 필요

#4. 문학 컨퍼런스
2028 제 1회 부산 파도 문학 컨퍼런스

준영은 흰 바탕에 큼지막한 푸른색으로 쓰인 현수막의 글씨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오늘은 서울 지역의 파도 문학회 회원들이 처음 대면하여 컨퍼런스를 진행하기로 한 날이었다.
아직 한산한 살롱 드 아난티의 라운지는 화려한 조명과 아늑한 가구 속에 고급스러운 자태를 보이고 있었다.
준영은 핸드폰으로 오늘의 뉴스를 보다가도, 나름 글 쓰는 사람들의 모임이기도 하여 핸드폰만 들여다 보고 있는 것도 애매한 구석이 있어 다시금 내려두었다. 준영은 너무 티나지 않게 주변을 다시 둘러보았다.
시선이 멈춘 곳에 한 여자가 있었다.
준영은 그녀를 알고 있다는 확신이 들었다. 분명 파도 문학회 회원일텐데, 어디에서 봤을까.
저번 달의 아난티 심야책방에서 마주친 적이 있었나. 어색함의 기류 속에 누구와라도 대화를 나누고 싶어, 준영은 그녀에게 다가가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섰다.

따사로운 햇볕이 아름다운 아난티의 창가에 비쳐드는 어느 오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