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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난티 타임즈

KOREA, MARCH~APRIL 2024

둘, 셋 안됩니다. 딱 한 순간만 꼽아보세요.

“가장 좋았던 여행 ‘딱 하나’만 꼽으면 어떤 거예요?” 누군가 물었다. ‘아니 너무 좋은 곳이 많은데 그걸 어떻게 골라?’라는 눈빛이 흘러나왔지만 내심 마음 속 원픽은 정해져 있는 듯했다. 그리고 마치 과거의 여행길로 1초 만에 타임머신을 타고 돌아온 듯, 대답을 결심하고 흐뭇한 표정을 짓는다. 세상 무서운 줄 모르고 용기 있게 혼자 떠났던 유럽 여행, 남친이 아닌 남편이 된 그이와 결혼이라는 제도 속으로 떠났던 설레는 하와이 여행, 회사에 당당히 사표를 내고 무작정 떠났던 일본에서 한 달 살기, 가장 낯설고 이국적으로 다가왔던 아프리카 여행, 더럽고 몸도 아팠지만 고생했던 여행이라 가장 기억에 남는다며 말하면서도 다신 못 갈 거 같다고 고개를 절레절레 짓는 모습까지… 가장 좋았던 여행에 대한 물음에 세계 곳곳의 나라와 도시 이름, 그 속의 문화가 끊임없이 흘러나왔다.

이번엔 다른 질문이 오갔다. “여행하면서 가장 좋았던 순간 ‘딱 하나’만 꼽으면 어떤 거예요? 둘, 셋 안됩니다” 그런데 이번엔 좀 다르다. ‘내 마음이 느꼈던 그 순간…’ 갸우뚱한 표정과 애매모호한 기억을 소환하고 재정립(?)하는 시간이 이어지더니 조금씩 환해지는 얼굴로 입을 연다. “35L 배낭을 메고, 네 발로 기어가며 트래킹을 하고 있었어. 이 무거운 가방을 당장이라도 던져버리고 싶었지만 그때 나는…”, “나는 혼자서 8개월 간의 12개국 여행을 끝내고 마지막으로 무심코 앉아서 쉬고 있는데 갑자기 ‘와 내가 이런 여행을 했구나.’하는 생각이 들었는데 울컥해서 울었어…”, “파리에 갔을 때 공원에 매트를 깔고 누워 있는데, 잠깐 낮잠이 든 거야. 약간 눈이 부셔서 슬그머니 눈을 떴더니 햇살이 내 얼굴을 감싸고 있더라고. 그 순간 정말 좋아서 기억에 남아.” 힘들었던 순간들도 모두 미화된다는 게 여행이라지만, 가장 마음이 동했던 최고의 순간들은 이상하리만치 평범한 순간들이었다.

여행 좀 다녔다고 자부하는 나 역시 평범하지만 그 자체가 힐링이고 행복했던 여행이 있다. 특별한 해외도 아니고, 혼자는 더욱 아니었으며, 딱히 고생스럽지도 않았다. 바로 부모님과 아이가 함께 했던 2박 3일 아난티 코브로 떠난 여행이었다. 3대의 중간에 ‘낀’ 나는 어르신을 모시는 가이드도 해야 했고, 미취학 아이도 있었기에 친절한 부모 역할도 놓쳐서는 안 되는(+먹을 계획부터 일정 계획까지 모두 내 몫), 소위 말해 밀린 효도, 육아 이벤트를 동시에 수행해야 하는 여행이었다. ‘꽃보다 할배’에서 할배 5명을 데리고 간 이서진이 가이드와 보호자를 자처했던 것처럼 부모님과 아이 사이에 ‘낀 자’의 여행은 시작되었다. 여행의 멤버는 부모님 둘, 형제 하나, 나, 그리고 미취학 아이 하나.

어마어마한 비가 쏟아지는 어느 오후, 아난티 코브 테라스 풀 하우스에 들어섰다. 여기저기서 와! 소리가 나왔다. 보고 또 봐도 과감한 층고와 큰 공간, 감탄을 금치 못했다. 우리 가족은 함께 여행을 가면 호텔에서도 꼭 두 개의 방이 연결되어 있는 커넥트 룸을 이용할 정도로 한 방에 묵는 걸 선호한다. 여행 가서 따로 있어야 한다면 차라리 집에서 함께 있는 게 낫다고 말하는 부모님과 아이의 연결고리는 꼭 살려야 하는 게 언제나 미션이었을 정도다. 그런 점에 있어 4인 정원이 각자 프라이빗하게 쓰고도 거실에서 모일 수 있는 아난티 코브 테라스 풀 하우스는 그저 ‘킹 오브 킹’이었다. 널찍한 공간에 바다가 탁 트여있는 거실과 각 침실, 헉 소리가 절로 나는 커다란 욕실, 전혀 좁지 않은 평온함과 오션뷰에 엄마는 하루종일 나가지 않고 객실에만 있어도 좋을 거 같다며 거짓말 같은 진심을 날렸다. 하지만 아난티에 왔는데 물놀이를 안 할 수 없지! 비가 와도 놀아야지! 객실에만 있어도 좋다는 부모님을 재촉해 인피니티 풀로 향했다. 나이가 드시면서 자연스럽게 수영장과 멀어졌을 부모님과 물놀이라면 무조건 좋아할 아이에게 바다를 향해 끝없이 펼쳐진 넘사벽 인피니티 수영장을 경험하게 해드리고 싶었다.

하지만 금세 엄마랑 함께 수영복을 갈아입을 생각에 얼굴이 붉어졌다. 나는 사춘기 때 왔던 ‘부모님에게 쑥스러운 중2병’이 서른 후반이 된 지금까지 가시지 않았다. 작은 몸에 2차 성징이 시작되면서 엄마랑 매주 갔었던 목욕탕 가는 날이 다가올수록 부담스러워졌던 어린 시절. ‘어떻게 하면 엄마랑 목욕탕에 안 갈 수 있을까’ 고민이 많았던 작은 아이는 많은 사람들이 나란히 앉아 적나라한 자세로 ‘때를 밀고 있는 행위’에 스며들지 않기 위해 부단히 눈치싸움을 했더랬다. 어른이 된 지금까지 나는 여전히 다같이 하는 공동샤워가 여전히 쑥스럽고 민망하다. 그런데 웬걸. 아난티 워터하우스는 ‘니 마음, 내가 알지.’라고 말하듯 프라이빗하게 탈의와 샤워를 할 수 있도록 설계되어 있었다. 움츠러든 어깨가 아닌 활짝 편 등과 허리, 당당하고 편안하게 샤워를 하고 자유로운 기분으로 수영장으로 나설 수 있었다. 한번 젖으면 더 이상 젖지 않는다 했던가. 주륵주륵 내리는 비는 물놀이를 할 때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다. 오히려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된 아빠와 엄마가 수영모를 꾹 눌러써서 못생겨진 채로 인피니티 온수풀에 나란히 서있는 모습을 보는 순간 너무 귀여워서 웃음이 나왔다. 그리고 우리 부모님 둘 사이에 있는 6살의 내 아이. 까르르 거리며 첨벙대는 몸짓에 할아버지와 할머니도 따라 까르르 웃는 비오는 날 물놀이의 순간은 한 장의 이미지로 마음 속에 꾹꾹 눌러 각인됐다.

‘우리 가족이 함께 하는 것만으로도 이렇게 좋다고?’ 중간에 ‘낀 자’의 의심은 미미하게 남아 있었다. 의심을 거둔 순간은 다음 날 아침 6시였다. 널찍한 테라스에 나와 바다를 보는데 조금씩 조금씩 태양이 나올 준비를 하더니, 일출이 시작되었고 어느새 파란 바다에 비친 반짝이는 아름다운 윤슬을 목격했다. “엄마~ 일출이 진짜 예쁘다”라는 6살의 앳된 목소리를 들으니, 왜 옛날 옛적 선비들은 자연을 보며 시까지 쓰며 감탄하고, 시조를 읊으며 그 순간을 기록하려 했는지 바로 이해가 될 정도로 이 순간이 아름다웠다. 이 순간, 테라스에 맨발로 나와 조용히 바라보는 우리 가족들. 이보다 더 마음이 동하는 순간이 있을까. 라는 생각도 잠시. 금세 조식을 먹으러 갈 채비에 또 분주해졌다.

아니나 다를까. 다시 ‘낀 자’가 된 나도 조식을 먹으러 갔다. 그 사이 태양은 더 높이 올라가 있었고, 바다는 더 파랗게 변해 있었다. 바다가 보이는 창 옆에 다같이 앉아 맛있는 조식을 먹고, 아침 일찍 일어나 가족이 모두 모여 식사를 하는 모습이 썩 마음에 들었다. 우아하고 기품있는 오션뷰 레스토랑에 언제나 시끌시끌하던 우리 가족은 꽤 오랜 시간 웃으며 식사를 한 것으로 기억된다. 비가 온 뒤 맑게 갠 날, 배를 채운 후 아이와 나는 다시 워터하우스로 향했고, 부모님은 해안산책로를 걷고, 하늘이랑 바다를 보며 객실에서 머물겠다고 하셨다. 이렇게 좋은 펜트하우스에는 오래 머무는 게 가장 좋은 거라는 말씀을 덧붙이며 씨익 웃으셨다. 이런 작은 순간들이 하나도 기억에서 사라지지 않는 여행이었다.

그래서 가장 좋았던 순간 딱 하나만 꼽으라면 그게 언제냐고? 그걸 어떻게 딱 하나만 꼽나. 매 순간이 다르게 좋았는데. 사람 참…